부고
선생님, 저예요. 오랜만에 편지를 써요.
그간 편지를 하지 못한 건 별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어요. 다른 이에게 편지를 썼고 그게 아닌 날에는 속세의 일로 조금 바빴어요. 그것도 아닌 날에는 마음이 바빴어요. 이제야 하루 짬을 내서 편지를 써요. 잘 지내셨기를 바랄게요.
얼마 전에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면접을 봤어요. 누군가는 그깟 일에 왜 그렇게 의미를 두냐고 하지만, 내겐 단순한 일이 아니었어요. 정말이지 3년을 꼬박 기다렸다구요. 그냥... 다 꿈같았어요. (좋은 의미는 물론 아니고요) 그날 시험을 마치고 건물을 나오는데, 가장 먼저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이런 날 선생님께 전화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런 날이 그때뿐이었던 건 아니지만요. 아침엔 안개가 자욱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정오가 되니 그제야 날이 개어서. 학교가 언덕 위에 있어서인지 서울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더라고요. 문득 한없이 외로워졌어요. 그래서 두 손으로 내 몸을 이리저리 만져봤어요. 이 단단한 팔꿈치며 굽은 등. 휘어버린 검지와 동그란 손톱들. 쌍꺼풀 없는 눈매와 작은 귓바퀴.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나. 오직 나. 내가 가진 것이 오직 이것뿐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외롭게 다가올 수가 없었어요. 내가 결국 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내가 자라 내가 되고 결국 나로 끝날 거라는 사실. 한때 부끄러웠고 어느 날에는 자랑스러웠던 그 사실이 이젠 외로워졌어요. 그 누구도 내가 될 수 없다는 건 너무 외로운 일인 것 같아요. 누구도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그 꼭대기에 서서 가만히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생각했어요.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 그 한 사람만 있으면 세상살이 얼마나 든든할까.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 꿈같은 날 딱 하루만 내게 오면 좋겠다. 나를 알아주는 그 사람과 딱 하루만 같이 살아보고 싶다. 마음껏 손잡고 마음껏 끌어안으며 예뻐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이지 당장 내일 떠나도 미련 없겠다. 그제야 미련 없겠다. 오래오래 찾아 헤맨 내 사랑. 평생 잊히지 않게 예뻐해 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내가 그 사람의 생에 힘이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면접 끝나고 할 만한 생각은 아닌데 참 웃기죠. 그러다 두려워졌어요. 그런 날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음을 알기에 삶이 한없이 고단해지고.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나는 한없이 홀로. 세상 모든 것을 홀로 해내야 함이. 외롭다 못해 비참했어요. 나를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하고 이대로 죽어버린다는 것은.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와 사랑하지도, 같이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 스쳐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요.
내가 이미 세상에 수백 수천 개의 돌을 던졌다는 사실도요. 누군가의 단짝이 되고 첫사랑이 되고 아픈 손가락이 되는 일. 나는 이미 너무 큰 죄를 지은 건 아닐까요. 두려운 일은 멈추지 않고 떠올랐어요. 이 치열한 외로움을 견뎌 마침내 도착할 어른의 땅. 똑같은 지옥일거란 확신이 자꾸 들어요. 그래도 삶이 더 심플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는데, 아닌가 봐요. 내가 나인 이상, 어쩔 수 없나 봐요. 다만 내가 내 육신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채감만 더해졌을 뿐이니까요. 이 무거운 육신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어요. 그러려면 영적인 것을 믿어야겠죠. 교회를 다니고 싶어요 진심으로요. 주님 믿고 다른 세상에 가고 싶어요. 거기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 오래오래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그러나 저는 이미 믿고 있는걸요. 이 육신을 벗고 나면 가벼운 마음으로 멀리 멀리 날아서. 저기 어디 사막 한가운데에 누워 별을 보고 있을 나의 마음을. 돌아갈 곳도 떠날 곳도 없이. 그제야 숨이 좀 쉬어진다며 시원하게 웃는 내가 보이는걸요. 그러고 나면 조금 덜 외로워질까 싶어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 하루씩 더 숨 쉬는 것이 두려워요. 시간이 흐르는 게 두려워요. 그리워 할 사람은 늘어나기만 하고 잊히지는 않겠죠. 지금도 가뜩이나 많은데. 떠나는 날 이곳에 그리운 것이 너무 많을까봐 두려워요. 그리운 이들이 많아질수록 삶이 무거워지거든요. 티켓은 왕복으로 끊고 돌아올 때를 걱정하고. 자꾸 그렇게 돼요. 그래도... 그리워할 사람이, 그리운 시간이 있다는 건 축복이겠죠?
아,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요, 선생님. 저 이제 곧 떠날 생각이거든요. 결국 이 말씀 드리려고 편지했어요. 멀리멀리 이 언어를 쓰지 않는 땅으로 갈 거예요. 왠지 그 곳에는 나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거든요. 나를 기다려주는 무언가. 그것이 하늘이건 바다건 하다못해 바닥의 어떤 벽돌이건. 나를 기다려주면 좋겠어요.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내가 보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로. 기다려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럴 거라고 믿어요.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2016년의 어느 봄날부터 그렇게 믿어왔어요. 그 믿음에 배신당할 날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단 떠나면 어떻게든 되겠죠. 제 삶은 다른 문턱으로 훌쩍 넘어갈 거예요. 그게 어디가 되었건 저는 괜찮을 거예요. 결국 제가 선택한 추방이니까요.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어요.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저를 기다려주면 좋겠어요. 이기적인 부탁이지만, 계속 이 곳에서 저를 기다려주세요. 그럼 돌아올게요. 정말이에요.
선생님. 어떻게 말해야 제 마음 닿을지 한참 고민하다가 적습니다. 힘껏 사랑합니다.
이름마저 낯선 2020년 10월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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