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스카 - 2030년 6월 (수족냉증/귤/트럼펫/고양이소리그리고부적)
몸이 살살 으슬으슬하고 춥다. 이제 정말이지 빙하기가 오려나 보다. 신체 말단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차가워졌고, 인간의 주방에는 시트러스 속의 주황색 열매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름은 ‘귤’이다. 인간들은 내게 그것을 하루에 한 소쿠리씩 가져다주곤 한다. 정말 이걸 내가 하루에 다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이 열매를 하루에 30개씩 해치우는 중이었다. 이 종족은 무엇이든 너무나 전투적으로 임한다. 그게 문제다.
만년필 잉크가 얼어버리기 전에 마지막 기록을 남긴다. 지금 이곳의 인간들은 화장터에 자리가 없어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 몇 해 전에 (스페인 독감과 비슷한) 변종 전염병이 돌았지만,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별 일 없이 자꾸만 죽어나간다. 정말 별 일 없이. 혼자 목을 매고 창밖으로 홀린 듯 몸을 던진다. 물론 역사적으로, ‘자살’은 지구에서 꽤 매력적인 죽음의 방식으로 통용되어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흔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나를 먹이고 재워주는 이 게스트 하우스에서도 어제 한 명이 죽어나갔다. 이 집안의 막내아들이 그 주인공이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저녁으로 마카로니 어때?”
“귀찮은데... 그냥 자살해야겠다.”
“그래! 그동안 고마웠다 아들. 나중에 만나자.”
끝이었다. 아들은 그 길로 집을 나섰고, 나머지 식구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본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일까? 나는 그 광경을 보고서야 이 행성의 종말을 체감했다.
근 20년간 지구를 연구하며 느낀 가장 큰 문제는, 여기 사람들은 무엇이든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인간을 멸종하게 할 것임을 나는 이미 예전에 (대략 2010년 즈음) 예측했다. 인간들은 빠르게, 많이, 잘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태어난 모든 재능과 힘을 투자했다. 계산하는 능력을 타고난 키티는 죽어라 공부해서 원전을 굴렸고, 빠르게 달리는 능력을 타고난 해바라기는 유년시절을 다 바쳐 올림픽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모두 죽어버렸다. 키티는 자기가 굴리던 원전이 터지는 바람에 방사능 피폭으로, 해바라기는 더 가질 수 있는 게 없다며 자살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장 큰 재능을 간과한 채 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나같은 외계인은 아무리 연습해도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 '사랑하는 재능'을 가졌음에도 제대로 쓰는 이는 몇 없었다. 다들 재고 빼고 망설이느라 평생을 다 버린다. 인간들이 서로 마음껏 사랑하기만 했어도 지구가 지금 이 모양은 아닐텐데. 비슷한 운명이 또 올거라는 헛된 기대에 빠져 의심하고 후회하고 주저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이름 한번 불러보는거다. 한때 정말로 같이 '살고' 싶었던 인간의 이름을. 이 얼마나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한없이 증가하던 지구의 인구수가 뚝 꺾인 것은 2025년이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사람들이 돌연사하기 시작했다. 내로라하는 석학들은 이 모든 현상이 지구 환경의 변화 탓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늦은 뒤였다. 그 무렵 영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대부분 붕괴했고, 지구 인간의 80%가 ‘난민’이 되었다. 난민이나 이민자를 들이지 말자고 주장하던 (한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정치인 트럼펫의 시체가 칠레의 해변으로 밀려온 사건도 한때 뜨거웠다. 그 와중에 수많은 나라들이 새로 생겼다. 바다 한가운데에 뗏목을 띄우고 그 위에 나라를 세운 청년들의 이야기가 뉴스 헤드라인에 걸리기도 했다. 얼굴의 절반이 수염으로 뒤덮인 곱슬머리 백인 청년이 시뻘건 깃발을 들고 바보같이 웃는 사진과 함께. 사람들은 그걸 보고도 웃지 않았다. 내 방 벽에는 아직도 그날의 신문이 붙어있는데, 이제 색이 바래서 청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나는 비록 인간이 아니지만, 그 청년의 미소를 보고 인류의 미래를 잠시 희망했었다. 그 미소가 어땠는지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날에는 외계인 주제에 조금 슬퍼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옛날 일이다.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았다. 아니지, 낳지 못했다. 2020년 무렵의 ‘비혼’이나 ‘딩크족’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숨만 쉬어도 몸에 중금속이 쌓이는 시대에 아이가 제대로 태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소각장에 갈 때면 늘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에 빛을 비춰보면, 팔이 3개이거나 머리가 찌그러진 아기들이 몸을 웅크리고 울고 있었다. 소각장 인부들은 그것을 고양이 소리라고 했다. 고양이는 빠르니까... 불 지피면 나갈 거예요. 그 말을 하던 소각장 관리인의 얼굴을 기억한다. 지친 표정. 질린 얼굴. 그는 출처도 모를 시뻘건 부적을 몇 개씩 겹쳐 품에 넣고서는 그런 소리를 했다. 고양이 소리에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그런 시대였다.
손이 얼어서 쓰기가 힘들다. 오늘은 이만 줄인다. 다시 통신하겠습니다. 귀 행성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하며. 2030년 6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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