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한병철)
2020-04-19 피로사회 완독.

어려운 책이다. 2개의 챕터는 메모조차 하지 못했다. 단어가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처음 보는 학자들의 이름과 논리는 공중에 붕 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긴 읽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읽으면 온전히 흡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2020년의 내가 읽은 피로사회는 이런 책이다.
- 우리는 면역학적 시대를 지나왔다. 안과 밖이 명확히 구분된, 타자성과 이질성의 소멸을 위해 공격과 방어라는 군사적 장치가 작동하는, ‘낯선 것은 무조건 막는다’는 맹목성이 본질이 되는. 그러나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 – 향유 대상이 되며 개인은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 면역의 근본적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시대의 종말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경증적 시대’의 폭력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기인한다. 정보에 대한 대응 방식이 면역 저항이 아닌 소화 거부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박탈이 아닌 포화)
- 이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개인과 사회에 ‘~하면 안 돼’, ‘~해야만 해’라는 당위를 부여하고, 이러한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그러나 성과사회는 긍정성의 사회이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다다르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에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으로 대체된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효율적이다. (능력이 당위를 지우는 것은 아니다. 당위+a) 성과사회의 긍정성은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은 자기 착취를 이끌어내고,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강제하는 자유’의 병리적 표출이다.
-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을 이끌어내고, 철학 등의 문화적 업적은 이러한 깊은 사색적 주의에서 온다. 이와 같이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의해 소멸되었다. (깊게 보지 못하고 넓게, 많이, 얕게 보는 과잉주의) 지금 세계는 활동과잉이다.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없었다. 현재 우리의 문명은 평온의 결핍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소실되었다. 귀 기울여 듣는 공동체도 없다. 경청의 재능은 사색적 주의 능력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거니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
- 사색적 주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이를 어떤 자극에 저항하고 중단하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과잉 활동성은 과잉 수동성으로 전도된다. 모든 상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무기력한 것이다. 활동과잉의 시대에서 우리는 돌이켜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계속 생각해나간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부정적 힘의 결핍이다. 이는 개인에게 분노의 여지를 주지 않는 사고이다. 분노는 새로운 상황을 촉발하는 능력이며 분노의 결핍은 개인과 사회를 자폐적 성과기계로 만든다.
- 성과사회에서의 피로는 개인을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하며 분열시킨다. 저자는 ‘근본적 피로’로의 전환을 말한다. 정신을 태어나게 하고 영감을 주며 무위 능력을 부여하는 피로. 개방적인 우애의 분위기로 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건강한 피로로의 전환.
책 뒷표지의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철학적 진단’ 이라는 카피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이 미친 자기 착취의 시대에서 개인의 고통은 철저히 고립된다. 그래서 우리는 안절부절 못하고 우울하며 혼란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나는 세상이 어지럽고 미쳤다고, 그래서 화가 나 죽겠다고 자주 말한다. 그러나 나를 정말 괴롭게 하는 것은 그런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이정도 밖에 못한다는 무력감과 자책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에 이것밖에 하지 못하는 개인에 대한 비하가 세계를 병들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탓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나. 나. 나. 부끄럽지만 나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색깔이라 믿고 싶다.
각각의 개인이 개별적인, 독립된 자아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시대이다. 들을 줄 아는 공동체의 부재가 불러온 비극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성공의 기준에 맞춰 만족할 줄 아는 삶은 이미 글렀다. 우리는 이제 아무리 가져도 부족할거다. 더 일하면 돈이 더 벌리고, 더 공부하면 명예가 더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도 나의 욕심에 가끔 놀란다. 뭘 더 바래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내 영혼을 채울 무형의 신념을 찾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질과 성과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생존이 가능할 만큼만 충족된다면 그 다음은 다른 가치를 찾아 만족을 얻어야 한다. (시대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일까? 쓰고 보니 현실을 버리고 환상에서 살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건 아닌데.)
지금의 나는 사랑과 성찰, 그리고 믿음으로 ‘들을 줄 아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그것이 미래의 내가 얻고자 하는 행복의 모양이지 않을까. 내가 오래간 꿈꿔온 ‘마음 맞는 근사한 사람들과 유연하고 실험적인 예술을 하는’모임이 아니더라도, 들을 줄 아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살고 싶다. 그러한 공동체가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굳혔다. 참 좋은 책이다. 더 공부하고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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